교회의 가르침

의사 조력 존엄사 법안에 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성명서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22-07-07 조회수 : 404

의사 조력 존엄사 법안에 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성명서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3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지난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의사 조력 존엄사’ 법안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합니다. ‘의사 조력 존엄사’는 이른바 ‘죽을 권리’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며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존엄사’라는 용어는 ‘환자가 고통 없이 존엄과 품위를 지니고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미화된 이미지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자살과 이에 가담하는 살인 행위입니다. 이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의사 조력 존엄사 법안 상정을 강력히 반대하는 바입니다.


1. 자살이든 타살이든 목숨을 끊는 행위는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이 파괴의 행위는 그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행위는 그의 존재 의미와 가치마저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됩니다. 어떤 사물이라도 귀중한 것이라면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일진대, 본디 귀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부당한 일입니다.


2.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여기에는 질병과 고통의 삶은 무의미하며, 인간 생명이 지닌 가치를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건강 내지 쾌락만으로 판단하는 현대 사회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러한 인간 생명의 본래적 가치와 희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이른바 ‘의사 조력 자살’에는 환자가 자살하도록 도와주는 의사의 개입이 들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목숨을 끊도록 돕는 것은 ‘생명의 봉사자’라는 의사의 고귀한 본분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의사 조력 자살은 의료와 의료인의 모습을 왜곡시킵니다. 사실 환자가 여전히 귀하고 그의 삶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환자의 의향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4. 교회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균형을 넘어서는 과도한 의학적 치료,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대해서는 양심 안에서 거부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생명의 복음」, 65항 참조). 그러나 말기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돌봄 행위들, 곧 수분 공급, 영양 공급, 일상적인 투약 등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기 환자의 고통에 함께하는 호스피스와 완화 의료는 바로 그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나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이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지금까지의 그러한 노력들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5. 한 사람이 임종하는 과정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생의 말기 돌봄, 마지막 인사와 애도, 시신의 수습과 안장, 사망에 대한 법적 처리, 사별 가족에 대한 돌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임종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함께 움직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공동체가 함께 겪는 사건입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전후 과정을 이웃과 사회가 얼마나 함께하였는가?’ 헤아려 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6. 형제자매 여러분! 존엄하고 품위 있는 임종에 필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경청과 돌봄이지, 죽이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른바 ‘의사 조력 자살’은 언뜻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심한 살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빌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의 생명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언제나 귀하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관심과 돌봄의 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생의 말기를 지내는 환자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경청을 얻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관심과 돌봄을 받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갈수록 메말라 가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생명의 문화를 지키고 증진시키는 길입니다.


 


2022년 6월 2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문 희 종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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